항목 ID | GC087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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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常撥 |
영어공식명칭 | Lee Sang Bal |
이칭/별칭 | 이상복(李尙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태수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9월 16일 - 이상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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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이상발 태룡리 장터 만세운동[용회동 장터 만세 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5월 14일 - 이상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이상발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안법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안법리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상발(李常撥)[1873~1947]은 1873년 9월 16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안법리(安法里)에서 이동하(李東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상복(李尙福)이라고도 불렸다.
[활동 사항]
민족 대표인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내려 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하였다. 통도사 승려 5명이 1919년 3월 20일 표충사를 방문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台龍里) 장터에서 장날이 열리는 날 만세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은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등에 시위 계획을 알렸다. 이상발은 1919년 4월 3일 단장면 고례리에 거주하던 장준식(張俊植) 등에게서 4월 4일 장날 단장면 태룡리 장터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만세를 부를 것이니, 고례리 주민들을 독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19년 4월 4일 장날 12시 30분경 태룡리 장터 등지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시위대와 함께 대형 깃발을 들고 앞에서 행진하는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을 따라 장터를 돌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상발과 박권하(朴權夏), 장만식(蔣萬植), 장인식(張璘植) 등 시위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태룡리 헌병주재소 건물이 부서지고 헌병군조는 시위 군중에게 맞아 쓰러졌다. 밀양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과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하였으며, 시위 군중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이상발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받았다. 이상발은 1947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이상발에게 200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