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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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權夏 |
영어공식명칭 | Park Kwon Ha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진성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0월 5일 - 박권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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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권하 태룡리 장터 만세 운동[용회동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4월 25일 - 박권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박권하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원서리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876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권하(朴權夏)[1883~1970]의 아버지는 박해익(朴海翼)이다. 박권하는 1883년 10월 5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박권하는 1919년 4월 4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태룡리에서 있었던 용회동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용회동 장터 만세 운동은 한용운의 지도로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내려보내 시위를 주도하게 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통도사 승려 5명이 3월 20일 밀양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용회동 장리 열리는 1919년 4월 4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4일은 장날이면서 사명대사의 춘향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 기대되었다. 표충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인근 사찰과 지역민들에게 비밀리에 시위 계획을 알렸다. 특히 박권하는 원서리 주민들을 독려하였다고 한다.
장날에는 아침부터 시위 주도 승려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장터로 숨어들어, 미리 연락해 둔 학생 5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도록 하였다. 정오쯤 5,000여 명이 장터로 모여들자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달아 장터 중앙에 세웠고,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에 수천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돌자, 헌병과 경찰이 해산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헌병주재소에 돌을 던져 부숴 버렸다.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증파되고 경찰이 출동하여 발포하기에 이르자 오후 2시경 강제로 해산되었다. 1919년 4월 4일 만세 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박권하는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박권하는 1970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박권하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