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99
한자 吳學成
영어공식명칭 Ohe Hak-s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 10월 1일연표보기 - 오학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오학성 밀양 태룡리 장터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20일 - 오학성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2월 10일 - 오학성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25년 6월 9일연표보기 - 오학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오학성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구천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411 지도보기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오학성(吳學成)[1880~1925]은 1880년 10월 1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오학성은 경상남도 밀양군의 표충사(表忠寺) 승려로서,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태룡리 장터의 시위는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인 한용운(韓龍雲)의 지시를 받은 양산 통도사(通度寺) 승려들의 영향으로 계획되었다. 통도사 승려 5명은 3월 20일 밀양 표충사를 방문하여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였다. 오학성을 비롯한 이장옥(李章玉), 구연운(具蓮運), 이찰수(李刹修), 오응석(吳應石) 등 표충사 승려들은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태룡리 시장 장날인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표충사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승병을 모집하여 왜군를 격퇴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는 사찰이었는데, 4월 4일은 사명대사의 춘향일(春享日)이기도 하였다.

만세시위를 결의한 오학성표충사 승려들은 「선서」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작성하여 인근 각처로 배포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거사 당일 사용할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만들며 시위를 준비하였고, 단장면을 비롯하여 산내면(山內面), 산외면(山外面) 등 각 마을을 나눈 후 집집마다 비밀리에 다니면서 당일 장터에 나와 만세를 부를 것을 연락하였다.

태룡리 장날인 4월 4일, 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학성 등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장터로 들어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였다. 정오 무렵 5,000여 명의 사람들로 장터가 가득차자 오학성, 이찰수 등 승려들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 아래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를 고창하였다. 열을 지어 장터를 행진하던 승려와 군중들은 단장면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건물을 부수고 헌병 등을 공격하였다. 밀양군 읍내에 있던 밀양헌병분견대에서 헌병들이 급파되었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등 무력을 행사하자 군중들은 오후 1시 30분경 해산하였다.

4월 4일 태룡리 장터의 만세 시위로 300여 명이 검거되고 70여 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오학성 역시 체포되어 동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919년 12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오학성은 1925년 6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오학성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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