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25
한자 林宏
영어공식명칭 Lim Goeng
이칭/별칭 임병찬(林炳讚)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2년 2월 12일연표보기 - 임굉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1년 3월 - 임굉 관립대구사범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월 23일 - 임굉 연구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4월 - 임굉 천마공립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 임굉 경찰에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43년 2월 8일 - 임굉 예심 종결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1월 30일 - 임굉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 임굉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3년연표보기 - 임굉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송지리 -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면 송지리 589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관립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78[대봉동 60-18]
활동지 천마공립국민학교 -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전 85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임굉(林宏)[1922~1950]은 1922년 2월 12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송지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임병찬(林炳讚)이다.

[활동 사항]

임굉은 1940년 11월경 장세파, 오용수와 만나 장차 교단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것 등을 논의하다가, 관립대구사범학교 동기생들을 규합하자는 데 의기투합하였다. 이에 회원 인선은 임굉에게 일임하고, 겨울방학을 마치고 개학하는 즉시 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임굉은 1941년 1월 23일 대구시 동운동에서 관립대구사범학교 8기 동기생[5학년]인 장세파, 이태길, 안진강, 김영복, 이무영, 최낙철, 강두안, 윤덕섭 등과 함께 비밀결사 연구회를 결성하였다. 1941년 2월에 오용수, 이원호, 윤영석, 박제민이, 3월에 양명복이 가입하여 연구회 회원은 모두 14명이 되었다. 이는 관립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및 다혁당과 함께, 1940년대 관립대구사범학교의 비밀결사 운동의 하나였다.

연구회는 표면상 학술 연구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 독립을 지향하는 결사였다. 장기적으로는 교사로 재직하는 학교 현장에서 민족해방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회 조직에서 임굉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결성된 뒤에는 교육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 1941년 3월 17일까지 연구회는 6차례의 연구 발표회를 가졌는데, 그 내용은 회원의 전공 분야 연구와 함께, 세계정세와 일본의 패전 및 조선 독립의 전망에 관한 것 등이었다.

연구회 회원들은 1941년 3월 관립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직에 임용된 뒤에도 매월 한 차례씩 활동 상황을 보고함으로써 성과를 공유할 것을 결의하였다. 임굉은 1941년 4월 함북 청진의 천마공립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1941년 7월 말 충남 홍성에서 교사 정현의 수업 내용을 계기로, 문예부의 간행물 『반딧불』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면서, 관립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불게 되었고, 1941년 8월 초순에는 임굉을 비롯한 연구회 회원들이 전원 체포되었다.

임굉은 1942년 1월 예심에 회부되어, 1943년 2월 8일 예심이 종결되었고, 1943년 11월 25일 구형 공판을 시작하여,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임굉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이 된 뒤에 출옥하였다.

임굉은 1950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임굉은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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