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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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講來 |
영어공식명칭 | Lee Gang-r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선미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 이강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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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이강래 남임호의 토지 매각을 주선하며 수백 원 확보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6월경 - 이강래 위안스카이가 광무황제에게 빌렸다는 은 26만 냥을 받아 낼 방법 강구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8월~9월 - 이강래 서울, 경상도, 황해도 등지에서 동지 규합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4월 11일 - 이강래 일제 관헌에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12월 28일 - 이강래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이강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이강래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하남읍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경상도 - 경상도 |
활동지 | 황해도 - 황해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강래(李講來)[1869~1932]는 1869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고 무단통치를 자행하자, 이강래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외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일제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신민회는 큰 타격을 받고 위축되었지만, 1911년 이회영 등은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독립운동 기지와 무관학교를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되어 뜻 있는 이들이 참여하였는데, 이강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강래는 1914년 6월부터 황해도의 재산가 남임호의 토지 매각을 주선하며 수백 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 1915년 6월경 이강래는 동지 6명과 함께, 중국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에 주재하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있을 때 (국왕) 고종에게 빌렸다는 은 26만 냥을 받아 낼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강래는 1915년 8~9월부터 서울과 경상도 및 황해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는 데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채 결실을 보기 전에, 이강래의 활동은 일본 경찰에 포착되고 말았다.
1916년 4월 11일 이강래는 중국의 서북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활동하던 중,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함께 모금 활동을 벌이던 김정빈, 이승호, 남정호, 유연건, 신언학, 이승규 등도 모두 검거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강래는 1916년 12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사문서 위조 행사, 사기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강래는 193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강래는 2009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