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38
한자 金榮宓
영어공식명칭 Kim Young-bok
이칭/별칭 월담(月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나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0년 8월 2일연표보기 - 김영복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6년 4월 - 김영복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월 - 김영복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연구회 조직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1년 3월 - 김영복 신암공립국민학교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41년 7월 - 김영복 연구회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1월 - 김영복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6개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김영복 밀양농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몰년 시기/일시 1993년 8월 30일연표보기 - 김영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영복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영복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고정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798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78[대봉동 60-18]
활동지 신암공립국민학교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암남로 285-6[종경리 215-2]
활동지 밀양농잠고등학교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1025-1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영복(金榮宓)[1920~1993]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월담(月潭)이다. 1920년 8월 2일 밀양군 상동면 고정리 798에서 아버지 김윤병과 어머니 고성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영복은 1936년 4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합격하였다.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동기생이자 동향인 임굉(林宏)[혹은 임병찬(林炳讚)]의 주도로 이태길, 최낙철, 장세파 등과 대구부에서 하숙하던 학우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조직, 학술 연구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배양하였다. 또한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민족 차별의 부당성에 대하여 교육하고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특별 지도하였다. 1941년 3월 중순까지 정기적인 연구 발표회도 가졌다. 김영복은 연구회 내 이과부 책임자 겸 사무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영복은 1941년 3월 졸업 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공립국민학교에 근무, 근무지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등 연구회의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을 통하여 비밀결사였던 연구회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년 8개월 간 미결수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인 1952년 밀양농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등 교직 생활을 하였다. 김영복은 1993년 8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김영복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는 김영복의 추모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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