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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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漕倉 |
이칭/별칭 | 삼랑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록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765년 - 후조창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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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후조창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
원소재지 | 후조창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
성격 | 조창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조창.
[개설]
후조창(後漕倉)은 조선 후기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삼조창(三漕倉) 중 하나이다. 삼조창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포(馬山浦)의 좌조창(左漕倉), 진주시 가산포(駕山浦)의 우조창(右漕倉), 밀양시 삼랑포(三浪浦)[현 삼랑진]의 후조창을 말한다. 후조창은 경상도 밀양부, 현풍현, 창녕현 등 낙동강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곳이었다. 중앙으로 수송하는 세곡은 대동미가 많았기에 선혜청(宣惠廳)이 삼조창을 주관하였다.
후조창에는 조운선 15척이 편성되었고, 각 선박에는 사공(沙工) 1명, 격군(格軍) 15명, 조보(漕保) 32명씩 배정되었다. 밀양부사(密陽府使)와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도차사원(都差使員)과 차사원(差使員)을 겸임하였으며, 약 100여 년간 운영되었다. 19세기 말 세곡의 납부가 면포와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면서 조운과 함께 조창의 기능이 소멸되어 갔다. 하지만 1882년(고종 19) 서양 선박인 증기선이 도입되어 세곡을 운송한 이후부터 세곡(稅穀)을 적재하는 주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는 등 19세기 말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건립 경위]
17세기 이후 경상도 남부의 전세와 대동미 등의 세곡은 각 고을의 지토선(地土船)과 경강(京江)의 민간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하였다. 하지만 운송 기간이 길어 시기에 맞춰 한성의 경창에 도착하지 못하는 등 사선(私船)을 통한 세곡 임운은 문제점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1760년(영조 36) 경상도관찰사 조엄(趙曮)의 장계(狀啓)에 따라 좌조창[마산창]과 우조창[가산창]이 설치되었으며, 1765년에 후조창[삼랑창]이 설치되면서 조선 후기 경상도의 조운 제도가 완비되었다.
[위치]
후조창은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에 설치되었다. 삼랑포는 낙동강과 밀양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수심이 깊고 해수의 역류로 강물이 얼지 않아서 대형 선박이 연중 운행할 수 있는 장소였기에 조창이 설치되기에 적합하였다.
[현황]
후조창이 자리하였던 곳에는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다. 다만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을 통하여 후조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후조창은 조선 후기 경상도 조창 중 유일하게 낙동강 유역에 설치된 조창으로 의미가 크며, 약 100여 년 간의 운영 양상을 통하여 조선 후기 경상도 세곡 운송 체계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