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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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蓋邦 |
이칭/별칭 | 유한(維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여석 |
출생 시기/일시 | 1563년 - 노개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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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노개방 식년 문과에 병과 24위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노개방 왜군에 항거하다 순절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노개방 사망 |
출생지 | 서가정마을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마을 |
사당|배향지 |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복천동 229-78] |
사당|배향지 | 중봉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풍천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문신.
[가계]
노개방(盧蓋邦)[1563~1592]은 1563년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유한(維翰)이다. 아버지는 노일(盧馹)이고 부인은 여흥이씨(驪興李氏) 이경옥(李慶沃)의 딸이다.
[활동 사항]
노개방은 10세에 이미 학문이 넓고 문장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26세이던 1588년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 24위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권지학유(權知學諭)로 임명되었다가, 동래향교(東萊鄕校)의 교수를 자처하여 유생들을 가르쳤다.
노개방은 1592년 봄 휴가를 얻어 밀양에 머물고 있다가 왜군이 침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향교에 모셔져 있는 성현들의 위패를 보호하고자 동래향교로 돌아갔다. 당시 동래향교에 봉안되어 있던 위패들은 동래성 정원루(靖遠樓)로 옮겨진 후였기 때문에 노개방은 정원루로 가 위패 앞에 예를 올린 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항거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동래성이 함락되자 노개방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노개방의 부인 여흥이씨도 밀양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서는 노개방을 도승지(贈都承旨)로 추증하고 밀양의 중봉서원(中峰書院)에 제향하였다.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송공단[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 북쪽에 노개방순난비가 세워져 있다.
나라에서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하여 이문 현판(里門懸板)을 내렸는데 이 현판을 단 이문(里門)이 서가정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현판에는 “충신절사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행동래교수 노개방” “증 숙부인 열부 여주이씨지여”라고 적혀 있다. ‘삼강동(三綱洞)’이란 마을의 별칭도 이문을 세운 뒤에 생겼다고 한다.